호렵도 : 북윈도
리뷰 0 위시 120

호렵도 요약정보 및 구매

삶의 환희를 담은 사냥 그림

상품 선택옵션 0 개, 추가옵션 0 개

출판사 다할미디어
저자 이상국
ISBN 9791189706159 (1189706156)
정가 20,000원
판매가 18,000원(10% 할인)
배송비 무료배송
포인트 정책 설명문 닫기

00포인트

포인트 정책 설명문 출력

선택된 옵션

관심상품

상품 정보

사은품
상품 기본설명
삶의 환희를 담은 사냥 그림
상품 상세설명
호렵도만의 독특한 의미, 새로운 미술사적 위상을 찾아서

민화와 궁중회화 등 우리나라 전통 채색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미술사 시리즈 ‘한국의 채색화 모던하게 읽기’ 2권이 나왔다. 〈삶의 환희를 담은 사냥 그림 호렵도〉이다. 호렵도(胡獵圖)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사냥 그림’을 가리킨다. 흔히 ‘몽고족’의 사냥 그림으로 알고 있거나 ‘호랑이 사냥 그림(虎獵圖)’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다. 이 책은 청나라 사냥 그림(수렵도)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우러 간 조선 사신(화원)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이것이 민중에까지 널리 보급, 민화로 안착한 궤적을 밝혔다. 특히 시리즈 1권 〈세계를 담은 조선의 정물화 책거리〉에서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가 “능숙한 서양화법으로 책거리를 그렸”음을 밝힌 바 있는데, 〈호렵도〉에서도 조선에서 처음 호렵도를 그린 화가로 김홍도를 지목한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당시 부연사행(赴燕使行)에 참가한 김홍도가 청나라 수렵도를 접하고 〈음산대렵도〉를 그린 기록이 남아있다. 〈음산대렵도〉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후 조선에서 그려진 거의 모든 호렵도에 김홍도 화풍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를 조선 호렵도의 시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 민화의 화목 중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호렵도만의 독특한 미술사적 위상을 드러낸 것이 이 책의 남다른 미덕이다.

목차
프롤로그_ 민화 시대의 도래, 그리고 호렵도

1장 조선에서 유행한 사냥 그림_ 호렵도의 기본적 이해
2장 상징과 교훈의 ‘인물화’_ 호렵도의 미술사적 위상과 분류새
3장 “황제가 맹호를 쓰러뜨리셨다”_ 호렵도의 원형, 만주족의 민족정신
4장 화살 한 발로 두 마리 사슴 잡는 ‘상무정신’_ 호렵도의 원형 〈목란도〉
5장 ‘청나라 연수’ 간 화원들, 호렵도를 들여오다_ 호렵도의 유행, 부연사행
6장 김홍도, 호렵도를 그리다_ 중국 사행 후 그린 〈음산대렵도〉
7장 조선 호렵도와 청나라 수렵도, 무엇이 다른가_ 청대 수렵도에서 빌려온 모티프
8장 ‘감계’를 위한 호렵도_ 정주의 군사정책과 청나라 기마전술의 수용
9장 군사 시설을 장식하다_ 호렵도의 군사적 용도
10장 벽사, 길상, 장식의 그림이 되다_ 민화가 된 호렵도
11장 호렵도, 새로운 형식을 열다_ 18세기 호렵도의 모색
12장 사치풍조에도 기품을 잃지 않고_ 왕실, 사대부의 호렵도가 민중의 품으로
13장 다양한 양식으로 거듭나다_ 19세기 말, 호렵도의 저변화
14장 백성 괴롭히는 탐관오리, 호랑이가 막아주길_ 민화 호렵도의 소재와 상징(1)
15장 서수의 등장, 시대의 어려움 극복하려는 의지_ 민화 호렵도의 소재와 상징(2)

에필로그_ 중국의 그림이 우리 민화가 되기까지
책속으로
넓은 평원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사냥을 묘사한 그림의 한 장면. 왕공귀족으로 보이는 무리가 말을 타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사냥꾼들이 사냥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사냥꾼들은 기마騎馬 자세에서 활을 쏘아 사냥감을 쏘아 쓰러뜨릴 뿐만 아니라, 칼과 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산천을 나는 듯이 내달리는 현란한 기마술을 자랑한다. 마상재 수준의 여러 가지 동작을 보여주는 사냥꾼들은 기마술뿐만 아니라 복장도 화려하다. 두발은 변발을 하고 있어 이들이 북방민족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실감 나게 묘사한 만주족의 사냥 그림을 호렵도(胡獵圖)라고 한다. - ‘1장 조선에서 유행한 청나라의 사냥 그림’ 중에서만주족의 대표적 사냥이었던 사슴 사냥에 대한 인식은 71세 노인 건륭제가 여전히 사슴 사냥에 열중해 있는 모습을 그린 〈홍력일발쌍록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슴과 사슴 사냥은 만주족의 민족적 원류에 대한 성찰이었다. 건륭제는 만주의식을 실현하는 장소로 강희제가 건설한 목란위장과 피서산장을 최적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가 목란위장과 피서산장을 건설한 의미를 잊지 않고 재위 60년 동안에 목란위장을 가장 좋아하는 수렵장으로 만들고 40번이나 찾아갔다. 건륭제는 선조들이 힘들게 차지한 강토를 한 부분도 잃지 않고 보존하려면 마땅히 용맹스럽고 전쟁에 능한 군대가 있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 ‘3장 황제가 맹호를 쓰러뜨리셨다’ 중에서〈목란도〉는 건륭제가 목란위장에서 연례적으로 행하던 가을 수렵 목란추선(木蘭秋?)을 하기 위해 자금성을 출발해서 이동하고, 궁장을 설비하고, 몽고귀족들과 잔치를 하며, 사냥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청대 궁정 기록화이다.
〈목란도〉의 미술사적 의의는 18세기 중국사회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외래 통치 집단의 예전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좋은 그림이라는 점에 있다. 또한 만주기인의 복식·장비·일상생활·농촌 풍경·몽고인들의 궁장 설비와 유목생활 등이 여실히 묘사돼 있어 가장 확실한 사료라 하겠다. 청나라 수렵도의 다양한 모습이 〈목란도〉와 비교됨으로써 이를 이해하는 교과서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호렵도와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는 다양한 부분에서 비교되는 좋은 자료임에 틀림없다.
- ‘4장 화살 한 발로 두 마리 사슴 잡는 상무정신’ 중에서살펴본 바와 같이 호렵도를 가장 먼저 그렸다는 김홍도부터 호렵도로 녹취재에 참여한 자비대령 화원들의 행적에서 볼 때, 호렵도는 이들이 중국 연행 시, 현지에서 청대 수렵도를 보고 조선에 전파한 행적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조선 후기에 수행화원 또는 군관으로 사행한 화원들은 대개 우수한 화원으로 선발됐고, 이들의 임무는 하명 받은 특별한 그림을 그려오는 것과 중국 현지의 중요한 그림들을 모사하거나 구입해오는 것이었다. 당시 화풍의 주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도화서 화원이 중국 회화를 접촉하고 이를 조선의 상황에 맞게 형상화시켰다는 사실은 이들이 청대 화풍을 조선 후기에 전파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 ‘5장 청나라 연수 간 화원들, 호렵도를 들여오다’ 중에서 19세기 이후의 민화 호렵도에서 ‘수자기’와 같은 군기가 등장하면서 주인공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선 문화의 보편화와 저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편화란 상하의 구분 없이 동질화된 것을 의미하고 세속화는 특정한 상층계층에서 누리던 문화가 그보다 격이 낮은 계층에서도 같이 향유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즉 수렵 장면은 군대 장수들의 막사에 적합함과 동시에 평화스러운 장면은 성공한 양반을 묘사한다. 이 인용은 호렵도가 장수들의 막사에 배치돼 있던 장식물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호렵도가 원래 왕공귀족이 사냥하는 그림이었으므로 앞으로의 출세를 기원하면서 호렵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 ‘9장 군사 시설을 장식하다’ 중에서 춘향의 방을 치장한 그림 중에 호렵도 병풍이 있고, 방치레를 하였다는 것은 장식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엽서에 혼례식의 배경으로 호렵도 병풍이 나타나는데 이는 호렵도의 용도가 일반적인 장식용 또는 생활용품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장식 용도로 호렵도를 비롯한 민화가 사용됐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민간의 장식적 용도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기록은 예대기(1845-1918)가 쓴 『균곡유고筠谷遺稿』 권 제1에 호렵도라는 제화시題畵詩이다. 이에 대해 강관식은 “청나라의 문물이 극성했던 조선 말기에는 어염의 민간장식 병풍으로까지 이런 그림들이 크게 유행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호렵도는 조선 말기에 이르면 민간에서 사용하는 단순한 장식병풍으로까지 용도가 변한 것이다.
- ‘10장 벽사, 길상, 장식의 그림이 되다’ 중에서 19세기 중기부터 후기의 작품들은 상층 문화의 저변화가 진행되는 사회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임진ㆍ병자년의 양란 이후 국가 제조사업의 성공과 국제무역의 흑자 등은 상품화폐의 발달과 도시의 팽창을 초래하면서 사치풍조를 만연케 했다. 사치풍조는 경제적 성장이 둔화된 영ㆍ정조 연간에도 계속 이어지면서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켰지만, 미술과 공연예술 등에서는 수요를 더욱 증가시키고 크게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 부를 축적한 중인 계층과 평민 계층이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향유하던 호렵도를 자신들의 문화 속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는 특히 민화가 본격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하던 때이므로 호렵도 역시 이 기간에 가장 많이 그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 ‘12장 사치풍조에도 기품을 잃지 않고’ 호렵도에는 모든 작품에 사냥개가 등장하는데, 주로 왕공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팔자 좋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원숭이가 등장하는 작품도 이따금 보인다. 원숭이는 재주와 출세를 상징할 뿐 아니라 장수, 벽사의 의미를 가진 서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렵도의 소재들은 시기별, 용도별로 다양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어 이를 해석하면 참으로 흥미롭다.
조선의 호렵도에는 유달리 호랑이 사냥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경기대학교박물관 소장 병풍에서 각 짐승의 수렵 장면이 10개가 있는데, 호랑이 사냥 장면이 5개나 된다. 심지어 19세기 이후 호렵도에서는 호랑이가 사냥꾼에게 달려드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는 조선 후기 시대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14장 백성 괴롭히는 탐관오리, 호랑이가 막아주길’ 중에서
출판사 서평
호쾌한 기상 뽐내는 사냥 그림에서
민중의 희로애락 담은 ‘민화’가 되기까지 # 호렵도 이해는 청나라 수렵도부터 ‘호렵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나라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만주족)이 한족을 누르고 명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투력과 상무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의 전투력은 실전 수준의 사냥 활동을 통해 길러졌다. 따라서 여진족은 청나라를 세운 이후에도 전통적 군사조직인 팔기(八旗) 제도에 따라 조직적인 사냥 훈련을 통해 전투력을 보존하고 무비(武備)를 갖추었다.
그러나 팔기군의 전투력과 상무정신이 점차 쇠락하자, 4대 황제인 강희제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1681년 목란위장을 세우고 가을마다 팔기군을 동원한 대규모 사냥 훈련인 ‘추선(秋?)’과 피서산장에서 북방 민족(몽골족) 위무 행사를 함께 시행했다. 그리고 만주족 무사로서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궁정 화가들에게 용맹스런 사냥 순간을 표현한 작품 수십 점도 그리게 했다. 〈목란도〉를 비롯해 〈홍력자호도〉, 〈홍력일발쌍록도〉, 〈위호획록도〉, 〈건륭제사렵도〉 등이 이때 그려진 ‘수렵도’이다.

# 청나라 수렵도와 부연사행, 그리고 김홍도 이러한 청나라 사냥 그림은 조선에도 전래됐다. 청나라에 보내는 사행단(부연사행)에 도화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화원들이 대거 포함됐는데, 중국 현지의 중요한 그림들을 모사하거나 구입하는 등 회화교섭을 하며 청나라 풍속이나 사냥 그림을 접했던 것이다. 한 예로, 꿩 사냥을 마치고 이동하는 일행을 그린 강희언의 〈출렵도〉는 연행 사절단이 목격한 중국 현지 풍습을 담은 것이다.
단원 김홍도도 1789년 사행을 다녀와 호렵도를 그린 기록이 있는데, 1855년 조재삼이 편찬한 『송남잡지』에 따르면 호렵도를 가장 먼저 그린 이가 김홍도이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도 김홍도의 〈음산대렵도〉를 감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홍도의 호렵도는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으나,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그려진 호렵도 대부분에 김홍도의 화풍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 사냥 그림에서 ‘민화’가 된 호렵도 호렵도가 처음 도입됐을 당시, 영ㆍ정조는 청나라의 무비정책에서 통치에 필요한 교훈을 얻기 위해 ‘감계용’이나 ‘군사용’으로 그리고 이를 이용했다. 문과 무가 양립하고 균형을 이루는 국가 정책을 세우려 한 것이다. 정조의 문집인 『홍제전서』에 보면 임금이 〈음산대렵도〉를 곁에 두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호렵도는 조선 후기, 오랜 평화가 지속되면서 군사적 감계 용도는 점차 퇴색되고 19세기 후반부터는 길상, 벽사, 장식을 위한 ‘민화’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상류층에서 향유하던 회화 문화가 태평성대와 함께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중산층 이하 백성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민화가 발달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즉 호렵도를 비롯한 민화들이 기층 민중들의 독자적인 그림이라기보다는 궁궐이나 관청 주변 최상류층의 그림이거나 그것이 저변으로 퍼져 토착화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호렵도의 ‘민화적 특징’을 단면적으로 들자면, 풍자와 해학이 나타나는 점이다. 호렵도에는 유독 호랑이 사냥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경기대학교박물관 소장 〈호렵도〉를 보면 각 짐승의 수렵 장면 10개 중 호랑이 사냥 장면이 5개나 된다. 19세기 이후 호렵도에서는 호랑이가 사냥꾼에게 달려드는 장면도 나타난다. 이는 조선 후기,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커지면서 호랑이 사냥을 명분으로 관리들이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일이 빈번해지자 이에 반발한 민심이 민화에 드러난 것이다. # 호렵도의 발전 단계와 상징 해석도 이 책에서는 이렇게 도입된 호렵도의 발전 단계를 3기로 구분하는데, 우선 호렵도 초기 양식을 잘 보여주는 18세기 작품들로 서울미술관 소장 〈호렵도〉(10폭 병풍)와 울산박물관 소장 〈호렵도〉(8폭 병풍)를 꼽았다.
19세기 중반부터 후기까지는 민화가 본격적으로 성행하던 시기로, 호렵도 역시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가천박물관 소장 〈호렵도〉(10폭 병풍),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호렵도〉(8폭 병풍), 울산박물관 소장 〈호렵도〉(8폭 병풍), 계명대학교박물관 소장 〈호렵도〉(12폭 병풍) 등이 있으며, 이전보다 장식성이 강조돼 화려한 채색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민화의 저변이 더욱 확대되면서 호렵도 역시 양식의 변형과 파격, 다양화가 나타난 다. 한국미술관 소장 〈호렵도〉(10폭 병풍),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호렵도〉(8폭 병풍), 경기대박물관 소장 〈호렵도〉(8폭 병풍), USC 아시아태평양박물관 소장 〈호렵도〉(12폭 병풍)를 들 수 있다.
또한 사냥 그림인 만큼 영모, 인물, 산수 등이 다양하게 묘사되는데, 작품 제작 시기와 상관없이 항상 등장하는 말, 사슴, 호랑이, 매 그리고 19세기 말 이후 주로 등장한 육아백상, 해태, 백호, 기린, 무기류, 의장물 등 호렵도의 소재와 상징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했다.

# 더 널리 계승되고, 더 많이 그려져야 할 그림 그간 민화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사료 부족으로 연구도 쉽지 않았던 호렵도. 이 책의 저자 이상국 박사는 성실하고 집요한 연구의 결실로, 청나라에서 유래했음에도 뛰어난 민화 장르로 안착한 호렵도의 독특한 위상과 미술사적 의의를 밝혀냈다. 이국적이고 호전적인 그림을 뛰어넘어 우리 민중의 희로애락을 정감 있게 표현한 민화 호렵도가 더 널리 계승되고, 더 많이 그려지기를 바라는 진심을 담은 책이다.
청나라 수렵도를 대거 입수해 민화 호렵도와 비교 분석하고, 보물 같은 국내 소장작들을 발굴해 다채롭고 화려한 호렵도만의 매력을 소개한 것도 저자의 공이다.
상품 정보 고시
도서명 호렵도
저자 이상국
출판사 다할미디어
ISBN 9791189706159 (1189706156)
쪽수 264
출간일 2020-12-25
사이즈 137 * 211 * 19 mm /414g
목차 또는 책소개 프롤로그_ 민화 시대의 도래, 그리고 호렵도

1장 조선에서 유행한 사냥 그림_ 호렵도의 기본적 이해
2장 상징과 교훈의 ‘인물화’_ 호렵도의 미술사적 위상과 분류새
3장 “황제가 맹호를 쓰러뜨리셨다”_ 호렵도의 원형, 만주족의 민족정신
4장 화살 한 발로 두 마리 사슴 잡는 ‘상무정신’_ 호렵도의 원형 〈목란도〉
5장 ‘청나라 연수’ 간 화원들, 호렵도를 들여오다_ 호렵도의 유행, 부연사행
6장 김홍도, 호렵도를 그리다_ 중국 사행 후 그린 〈음산대렵도〉
7장 조선 호렵도와 청나라 수렵도, 무엇이 다른가_ 청대 수렵도에서 빌려온 모티프
8장 ‘감계’를 위한 호렵도_ 정주의 군사정책과 청나라 기마전술의 수용
9장 군사 시설을 장식하다_ 호렵도의 군사적 용도
10장 벽사, 길상, 장식의 그림이 되다_ 민화가 된 호렵도
11장 호렵도, 새로운 형식을 열다_ 18세기 호렵도의 모색
12장 사치풍조에도 기품을 잃지 않고_ 왕실, 사대부의 호렵도가 민중의 품으로
13장 다양한 양식으로 거듭나다_ 19세기 말, 호렵도의 저변화
14장 백성 괴롭히는 탐관오리, 호랑이가 막아주길_ 민화 호렵도의 소재와 상징(1)
15장 서수의 등장, 시대의 어려움 극복하려는 의지_ 민화 호렵도의 소재와 상징(2)

에필로그_ 중국의 그림이 우리 민화가 되기까지
배송공지

사용후기

회원리뷰 총 0개

사용후기가 없습니다.

상품문의

등록된 상품문의

상품문의 총 0개

상품문의가 없습니다.

교환/반품

[반품/교환방법]
마이페이지> 주문배송조회 > 반품/교환신청 또는 고객센터 (070-4680-5689)로 문의 바랍니다.

[반품주소]
- 도로명 : (10882) 경기도 파주시 산남로 62-20 (산남동)
- 지번 : (10882) 경기도 파주시 산남동 305-21

[반품/교환가능 기간]
변심반품의 경우 수령 후 14일 이내, 상품의 결함 및 계약내용과 다를 경우 문제점 발견 후 30일 이내

[반품/교환비용]
단순 변심 혹은 구매착오로 인한 반품/교환은 반송료 고객 부담

[반품/교환 불가 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단지 확인을 위한 포장 훼손은 제외)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악세서리 포함)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예) 음반/DVD/비디오,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1)해외주문도서)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 (1) 해외주문도서 : 이용자의 요청에 의한 개인주문상품으로 단순변심 및 착오로 인한 취소/교환/반품 시
‘해외주문 반품/취소 수수료’ 고객 부담 (해외주문 반품/취소 수수료 : ①양서-판매정가의 12%, ②일서-판매정가의 7%를 적용)

[상품 품절]
공급사(출판사) 재고 사정에 의해 품절/지연될 수 있으며, 품절 시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이메일과 문자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소비자 피해보상, 환불지연에 따른 배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 기준 (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됩니다.
- 대금 환불 및 환불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함.

회원로그인

오늘 본 상품

  • 호렵도
    호렵도
    18,000